인간 내면의 악 (惡), 그 끝은?
- 이수정
- 2013년 8월 23일
- 5분 분량
이수정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을 읽고-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고, 아직까지도 그것은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 중 하나이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모든 인간에게는 사단 (四端) – 불쌍한 것을 보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 (惻隱之心)이 있고, 나쁜 것을 보면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羞惡之心)이 있으며, 지나친 것이 있으면 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 (辭讓之心)이 있으며, 잘못을 보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是非之心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약한데 교육을 통해 비로소 선해지는 존재라고 보았다. 즉, 인간이 아기일 때에는 이기적이고 무질서하지만 예를 배우고 악을 제거함으로써 선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정답은 나오지 않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토대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현대 고전 소설 대표작인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하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써 내려간 책이다.
저자 윌리엄 제럴드 골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1911년에 영국 서남단의 콘월 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며 처음에는 부친의 의사에 따라 과학을 공부했으나 2년 후 어릴 적부터 좋아하였던 문학으로 돌아와 영문학 중에서도 특히 고대 영문학에 역점을 두어 공부하였다. 재학 중에 나온 ‘시집’이 그의 첫 번째 책으로, 29편의 짤막한 서정시를 묶은 것인데 뒷날 그는 한 권도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결혼 후, 그는 솔즈베리에 있는 ‘비숍 워즈워드 스쿨’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영국에서 퍼블릭 스쿨에 속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영국해군에 입대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포함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중위로 진급하기까지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의 취미인 그리스 고전 읽기는 해군 복무 당시 망보는 시간의 무료를 달래기 위해서 시작했다 한다. 이때의 전쟁 경험은 그로 하여금 그가 지니고 있던 소박한 이상주의를 버리게 해주었고, 이후 그의 최초 장편소설이자 출세작인 ‘파리대왕’을 집필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소설 ‘파리대왕’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들과 미국 등지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켜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국에서는 1907년 키플링 이후 여덟 번째의 노벨 문학상을 1983년도에 그에게 안겨주는 데 결정적인 역작으로 평가되었다.
세계대전 종전 약 10년 후,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 확실하게 된 상황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 영국인들은 어린 소년 25명을 비행기에 태워 남태평양의 외딴 곳으로 피난을 보냈다. 소년들이 탄 비행기는 피난처를 향해 날아가는 도중 적국 비행기의 요격을 받았으나 잦은 고난 끝에 기장의 침착한 노력으로 어느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이 아이들은 약 6살부터 12살까지의 소년들로, 영국의 귀족학교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제복을 입은 모습으로 무인도에 착륙하였다. 비행기가 바다에 무인도 바로 앞 바다에 떨어진 탓에 아이들은 각자 수영하여 무인도에 도착하였고, 주인공 중 한 명인 랠프가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하였다. 그러나 섬의 어딘가에 모두가 숨어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자신이 있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소라를 꺼내 들어 무인도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의 웅장한 소리가 나도록 불었다. 그러자 저 멀리 숲에서, 바위 뒤에서, 아이들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내어 랠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것이 파리대왕의 실질적인 첫 부분이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무인도를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목표로 삼아 몸에 밴 조직성과 사회성을 바탕으로 생존과 구조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처음에 모두를 모으기도 하였으며 아버지께서 해군 장교이신 가정에서 자란 랠프를 리더로 선출하고, 민주적인 대영제국의 사회에서 교육받은 아이들답게 문명으로부터 배운 대로 행동해 나갔다. 랠프는 구조를 위해서는 봉화를 피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여 이를 지시하고, 소라를 이용해 회의를 집행하고 순번을 정해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하는 등 원만한 조직을 유지하였다. 오직 소라를 쥐고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자격이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압도하는 힘은 없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모임을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민주적인 지도자였다. 그러나 예상한 것보다 구출이 쉽게 되지 않음을 깨닫고 점점 야생에서의 생활이 계속되자 아이들은 자신 안에 도사리는 충동을 제압하기가 어려워졌고, 알게 모르게 리더 자리를 노리던 잭의 세력이 강해졌다. 잭은 랠프의 지시 아래 사냥부대에 속해있다가 그 우두머리가 되었고, 당장의 먹을 것이 필요하니 무조건 사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 친밀한 사이였던 랠프와 잭은 각각 구조를 위한 활동, 그리고 사냥을 통한 생존과 자기보호라는 대립되는 견해를 펼치며 사사건건 다투게 되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욕구 충족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비밀스럽게 잭을 옹호하던 소년 그룹들은 완전히 랠프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갈등 양상은 두 소년의 리더십이 어떻게 부딪히는지, 그 와중에서 군중은 두 소년을 어떻게 따르게 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간 내면 안에 숨은 광기와 권력욕을 아주 잘 보여준다.
한편, 랠프 곁에 남은 소수의 아이들 중 랠프와 잭의 말다툼을 말리려던 ‘돼지’라는 별명의 소년은 잭에게 뺨을 맞는 바람에 안경 한 알에 깨지고 말았다. 심한 근시가 있는 돼지는 안경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으며, 그의 안경은 랠프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불을 피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랠프는 다시 회의를 소집하여 봉화 관리의 철저와 오두막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잭을 우두머리로 한 사냥팀은 이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무인도에서 아이들이 살아가던 중 바깥 세상에서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어느 날, 죽은 낙하산병이 무인도에 떨어졌고 이를 목격한 꼬마들이 짐승을 보았다고 소문 내는 바람에 소년들 사이에는 공포감이 더욱 강해졌다.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랠프는 수색대를 조직하지만 그들 역시 산 정상에서 발견한 시신을 보고 괴물인 줄 알고 도망간다. 이 ‘괴물’이 소설 파리대왕의 주제 의식을 가장 잘 대변하는 소재이다.
다음 회의에서 랠프와 잭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랠프의 세력은 점차 악화되어 그의 편에는 돼지, 샘과 에릭이라는 쌍둥이 형제, 사이먼 만이 남게 되었다. 나머지 소년들은 언제 올지 모를 구조선을 기다리면서 민주적 절차를 따르는 불편을 감수하기보다는 당장의 위협 (괴물) 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 같은 잭이 당장에 더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잭의 사냥부대는 공포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점점 야만성과 파괴성향의 세계로 몰입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 선 잭은 자신의 리더십을 유지하고 소년들에게서 안정된 지지를 받기 위해 갈수록 무리한 설정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사냥패는 멧돼지를 잡아 머리를 도려내어 자신들에 두려워하는 짐승에 대한 제물로 숲 속 동굴 앞에 꽂아 두었다. 잭은 이를 기념하여 잔치를 열고, 랠프의 패거리를 초대하였다.
사냥패들은 야만족처럼 온몸에 색칠을 하고 춤을 추고 주문을 외우며 모닥불 주변을 뛰어다녔다. 사이먼을 제외한 모든 소년들이 축제에 있는 사이, 사이먼은 두려워하는 짐승의 정체가 실은 사람의 시체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다른 소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축제 장소로 뛰어갔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 뛰어오는 실체를 두려움의 존재인 짐승으로 생각한 소년들은 날카롭게 간 창으로 사이먼을 마구 찔렀고, 그의 시체는 바닷속으로 밀려 나갔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설정은 사이먼을 마구 죽인 인물 중 랠프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잭의 사냥패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축한 후 돼지의 안경을 훔쳐가 버리고, 안경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돼지는 잭이 진을 친 성채 바위를 찾아가 안경을 돌려 달라고 호소하나 묵살 당했다. 결국 랠프와 잭은 몸싸움을 하게 되었고, 잭의 패거리인 로저가 굴린 바위에 맞은 돼지는 죽었다. 혼자 남은 랠프는 자신이 위험에 처했음을 깨닫고 도망쳐 숨지만, 잭의 패거리들은 이미 오랑캐로 변해 랠프를 죽이려는 작전을 짠 상태였다. 몇 번의 위험한 죽을 고비를 넘긴 랠프는 풀 숲을 지나 가까스로 바닷가로 나왔다. 잭은 숲에 불을 지르고 랠프를 쫓아가 바닷가에 다다랐다. 더 이상 자신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랠프는 바다를 향해 달려가다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들자, 잭이 피운 불을 보고 그곳으로 온 영국 해군 장교가 서 있었다.
작품의 제목인 ‘파리 대왕’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매우 상징적인 단어이다. 파리 대왕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악과 야만성의 상징이다. 이것은 원래 헤브리어로 ‘벨제버브 (Beelzebub, 직역하면 ‘곤충들의 왕’)’ 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흔히 ‘악마’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는 프로이드가 말하는 ‘이드 (id, 무의식)’ 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문명 사회에서 ‘이드’는 ‘에고 (ego, 자아)’ 나 ‘슈퍼 에고 (super-ego, 초자아)’ 의 힘에 눌려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 문제만 남겨진 극한 상황에서 ‘이드’는 ‘에고’ 를 너무나 쉽게 눌러 버린다. 한번 ‘이드’의 힘에 몸을 맡긴 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과 같아져 버린다. 소설 ‘파리대왕’에서 잭은 이드, 랠프는 에고, 사이먼은 슈퍼 에고를 상징한다. 잭과 동료들이 얼굴에 색색으로 칠을 하여 문명인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손에 죽은 돼지의 피를 묻힌 채 “돼지를 죽여라, 피를 흘려나, 때려잡아라.”라는 말을 외치는 장면이 있다. 이성도 지성도 마비된 채 폭력의 광기에 몸을 내맡긴 이들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모든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성선설’을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너무도 쉽게 피와 폭력에 물들고 동조하는 모습 역시 부인하기는 어렵다.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왕따 문제나 학교 폭력 역시 우리의 잔인한 본성을 보여주는 것들에 포함된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악을 보여주려 한 저자 골딩의 의도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영 찝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르면 전쟁과 학살 등은 어떤 사회 제도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악한 성질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미래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우리는 겉으로는 도덕과 이성의 중요성을 외치지만, 경쟁에서 남을 밟고 올라설 때에는 피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안의 악이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한 경쟁 사회라는 것 자체가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파리 대왕’을 통해 우리 안의 숨겨진 추악한 면을 똑바로 볼 용기가 생긴다면, 그 다음엔 우리의 악마성을 뛰어넘을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지금껏 역사를 이룩하고 발전해오며 많은 잔인한 과정을 거쳐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을 통해 이만큼의 문명, 학문, 그리고 문화를 건설하고 지켜온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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