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ng
하무리

지은이 티찌아노 테르짜니 (Tiziano Terzani)는 1938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피사고등사범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리즈 대학에서 국제법으로 석사 학위를 땄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하크니스 재단 장학생으로 2년 동안 중국학을 공부했고, 1972년부터 1997년까지 독일의 세계적인 시사 주간지 <슈피겔>의 특파원으로 싱가포르, 홍콩, 베이징, 도쿄, 방콕, 뉴델리에 주재하면서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내전, 문화 혁명 이후의 중국 등 아시아의 격동적인 현장을 누볐다. 기자 일을 그만둔 뒤에는 한동안 히말라야에 들어가 영성 수련을 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다시 한 번 회전목마를(Un altro giro di giostra)](2004)이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됬다. 이외에도 [표범의 가죽](1973), [자유](1975), [금지된 문 뒤에서: 중국기행](1985), [날개 없는 비행](1995), [아시아에서](1998), [반전(反戰) 편지](2002) 등을 썼으며, 2004년 7월(66세) 이탈리아 오르시냐 산골 별장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인생이야기
Soojung Lee (이수정) - 네 마음껏 살아라 (타찌아노 테르짜니 지음, 이광렬 옮김, 들녘, 2010)를 읽고
책 줄거리
병이 깊어 생의 끝자락에 선 아버지가 이탈리아 산골오두막으로 아들인 폴코를 불러 석 달 동안 나눈 대화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책머리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다. “매일 한 시간씩 같이 앉아서 너는 그 동안 궁금했던 것을 묻고, 나는 허심탄회하게 답하고 하면 어떻겠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하여 시작된 부자의 만남 덕분에 독자는 가난하고 앞날이 암담한 집에서 태어난 그가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을 거부하고,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을 찾아나서는 긴 인생역정에 동행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담담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테르짜니는 젊은 날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기자로서 베트남, 중국, 캄보디아 등 역사의 현장을 누비기도 하였다. 인간에 의한, 인간집단에 의한 사회개혁, 혁명이 초래하는 문제를 현장에서 직봅 보고 한계를 체험하였다. 그리고는 히말라야로 들어가 자신의 내면세계로 침잠한다.
그는 66세의 나이에 불치의 병이 들었다. “여보, 누가 우리한테 10년을 더 살 수 있는 약을 준다면 받겠어요?” 아내가 묻자 “아니! 나는 그런 약 안 먹는다. 10년이나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왜냐고? 이미 했던 일들을 또다시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난 히말라야에 가서 평화의 큰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왔어. 왜 다시 조각배를 타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배 댈 곳을 찾아다녀야 한단 말이야? 그런 일은 이제 흥미 없다.”라고 테르짜니는 답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한 소식한 분과 같이 죽음에 대하여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Prologue에서는 뻐꾸기 소리 들리는 밤나무 아래에서, 테르짜니가 예순 여섯 살의 인생을 정리하며 죽음을 앞두고 삶과 욕망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1장 [두 세계 사이에서], 제2장 [역사의 한복판], 제3장 [종착역으로], 제4장 [이름 없는 자로 떠나다] 등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세계 사이에서
제1장 [두 세계 사이에서]는 그가 태어나 독일의 <슈피겔>지 기자가 되기까지 과정의 기록이다. 지독히도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부모가 바라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길을 가지 않고, 더 큰 세상으로 가기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방학을 이용하여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프랑스 파리, 벨기에, 독일 등 더 넓은 세상구경을 하고, 피렌체에서 최고 점수로 대학입학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은행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편지에도, 온 가족의 열망도 뿌리치고 피사고등사범학교 법학부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은행원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모든 일의 상징’이라 생각하고 부모님의 굳은 가치관을 박차고 ‘나의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해 주고 싶어 변호가사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법학부에 들어갔고 사회변혁을 꿈꾸며, 이윤이나 돈, 물질주의로 운영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려는 간디와 마오쩌둥의 사상서적을 읽고 매료되었다.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하자 장관과 대사로 임명해 주겠다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무기를 들고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나라를 해방시키고자 전장으로 떠난 아르헨티나의 체 게바라에 열광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영국의 리즈대학으로 가 국제법 석사학위를 땄다. 부인의 심각한 신장염 때문에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유럽최대의 사무기기회사 올리베티에 취직을 했다. 올리베티에서 타자기와 계산기를 만들어 팔고, 인재를 영업을 위해 덴마크, 포르투갈, 독일, 네덜란드를 돌고, 영업을 위해 남아프라가의 보츠와나와 레소토 등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넬슨 만델라가 있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운동도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와 유럽청년 매니저 모임에서 미국을 성토하는 열변을 통해 미 관계기관의 주선으로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의 하크니스 재단에서는 좌파의 유럽 젊은이들을 미국화하려고 장학금을 주고 미국으로 불러들였었는데 그는 오히려 거기서 더 좌파가 되었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중국어와 중국사를 공부하고, 미국을 알게 되었다. 미국이 철저히 인종주의적이고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라는 것을.
유학하는 동한 극히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중국에 대한 많은 것을 접하면서 마오의 어록과 사상에 심취하게 되고, 문화혁명까지 흥미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로 가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었다. 미국 생활 2년 동안 라스트롤라비오 지에 매주 한 건식 기사를 섰고, 뉴욕타임즈의 수습기자 생활도 했다.
1969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운 좋게 밀라노의 <일 조르노>지에 들어가 편집국에 2년 동안 근무를 하였다. 당시 시장을 찾아가 “전 편집국에 있을 체질이 아닙니다. 중국에 특파원으로 보내주세요”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는 거기를 과감히 뿌리치고 침낭 하나만 가지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큰 신문사는 다 찾아 다녔다. 그러다 독일 함부르크의 <슈피겔>을 찾아갔고, 아시아로 가고싶다고 하여 계약직으로 채용이 되었다. 가족은 피렌체로 돌려보내고 1971년 12월, 그는 아시아로 떠났다.

역사의 한복판
제2장 [역사의 한복판]은 테르짜니가 아시아로 떠나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중국까지 격변의 현장을 직접 겪고 바라본 생생한 역사 기록이다.
1972년 봄,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에서 북 베트남의 대공세가 벌어졌다. 그는 사이공에 도착하자마자 전선으로 달려갔다. 차에서 내리자 총알이 귓전을 스쳐 지나갔고 논두렁엔 베트콩들의 시체가 널렸다. 그 전쟁에서 어느 쪽이 불의를 행하고 있는지 눈에 들어왔고 베트콩의 입장이 이해됐다. 하루에 쌀 한 줌밖에 못 먹고 비쩍 마른 베트콩들과 네이팜탄을 쏟아내는 B-52폭격의 대량살상은, 민중들로 하여금 그들 편이 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처절하게 저항했고 미국은 병력 50만을 투입하고도 이기지 못했다. 베트남인들은 19세기 말 프랑스인들이 하노이 항에 들이닥친 순간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1975년 미국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 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1973년 그는 극적으로 베트콩 마을을 찾아가서 며칠을 보냈다. 서방 언론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는 매일 밤 다른 마을에서 자며 그들의 사회 속을 들여다봤다.
“멋진 경험이었어. 타자(他者)들 속으로 들어가 본 거야.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뭘 원하나? 그들은 어떻게 사나?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지.”
그때까지 시체로만 보던 베트콩의 실체를 직접 체험하고 이를 세상에 알렸다.
베트콩과 접촉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캄보디아의 게릴라 크메르주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그들도 역시 시체로 밖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5년 캄보디아의 프놈펜이 크메르루주에게 함락되었다. 그는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으로 가서 캄보디아를 향해 도보로 들어갔다. 크메르루주가 서방기자들을 보는 즉시 모조리 죽인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땅굴에 숨어살았기 때문에 눈빛도 얼굴빛도 회색인 이상한 어린 병사들한테 그는 붙잡혔다. “권총으로 즉결 처분하려는 그들에게 난 슬며시 웃기 시작했어. 언젠가 너한테도 얘기해줬지만 이건 정말 알아둬야 한다. 누군가가 너를 노리는 상황이 오면, 그를 향해 꼭 미소를 지으렴.”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여권을 꺼냈고 중국어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난 이탈리아 기자란 말이다.” 그러자 그 군중 속의 한 중국인이 다가와 통역을 해줬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살아나 태국 국경까지 배웅을 받으며 살아 돌아왔다. 행운이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그 직후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친구 기자가 아무 이유 없이 베트콩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 무서워 가기 싫었지만, 특종을 놓치고 평생 후회하지 말라는 아내의 격려에 갈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순간에 그 현장에 있었고, 시대의 맥박을 느끼고 세상에 알렸다.
전쟁이 끝난 뒤 종종 베트남을 방문했고, 그의 책 [자유]는 베트남어로 번역되어 베트남 학교 교재로 쓰였으며, 그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대로 역사는 바른 방향으로만 가는 게 아니었다. 남베트남 고위 장교들이 갇힌 수용소의 광경은 나치강제수용소와 같았다. 인간 이하의 대우와 학살이 자행되었다. 공산주의 정권은 체제의 위협을 지키려 권위주의화 되었다. 그가 생각했던 혁명, 좀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는 그곳에서 실현되지 않았고 수많은 보트피플만 양산했다. 캄보디아는 더욱 최악이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폴 포트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으려면 브루주아를 전멸시켜야 된다고 생각했고 학살을 자행했다. 모든 도시와 도시적인 것을 파괴했다. 앙코르와트 사원에는 수 킬로미터 이르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일종의 예언이었던 거야! 부조는 후대에 일어날 일을 모두 보여주고 있었어. 학살, 몽둥이에 맞아 죽거나 악어 밥으로 던져지는 사람들, 배가 갈린 채 비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천 년 전에 해 놓은 예언이었지.”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1980년에야 그토록 가고 싶던 중국에 가게 되었다. 1972년 이미 마오는 죽었고 화궈펑 체제하였다. 기대에 부풀어 도착한 중국은 그의 이상향이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은 모두 감시되었고, 숙소는 도청되었으며, 그의 활동에는 감시자가 항상 동행하였다. 신장성을 방문했을 때나 티베트에서도 자유는 없었고, 그 때마다 그는 감시원 몰래 숨어들어 그들의 속살을 훔쳐보건 했다. 그가 중국에서 가장 크게 느낀 환멸은, 사람들이 감수했던 궁핍과 비참함과 끔찍함과 죽음... 그 희생과 현실 간의 간극이었다. 그들의 사회개조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고 사람들은 끝없이 고통을 당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마오쩌둥의 중국 연구에 몰두하던 한 청년의 꿈과 환상은 중국인에게는 하나의 악몽이었다. 그때 접했던 모든 선전물들은 철저히 조작된 것이었고, 그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혁명은 마치 어린아이 같지. 처음에는 작고 귀엽지만 시간이 지나면 추하고 야비한 어른으로 변하거든. 모든 혁명의 탄생 순간은 황홀한 데가 있어. 새로운 것을 약속하지.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 거짓된 모습이 들어난단다.”
“1969년에 시작된 문화혁명은 중국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공산주의는 끝났다. 완전히 종 쳤지. 인류 문제의 해결책으로 공산주의 사상은 완전히 실패한 거야.”
그 뒤로 그는 현실 정치에 관한 기사를 쓰지 않았다.

종착역으로
제3장 [종착역으로]는 테르짜니가 세상을 바꿔 보려고 노력하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인도로 들어가 구도의 길을 걸어보려 한 과정이 그려져 있다.
그는 권력에 관해 비판한다.
“권력은 사람을 꾀지. 매혹적으로 시갖해서 결국 통째로 삼켜버려. 선거 때 대통령 후보랑 같이 앉아서 밥 먹고 떠들고 하면 금세 그 캠프 사람이 돼. 그럼 그의 똘마니가 되는 거지. 난 그런게 싫었다.”
“누가 폼을 잡으며 장군처럼 으스대거든 그가 아침마다 똥 누는 장면을 상상해봐라. 별 거 없는 거야.”
그는 네팔의 무스탕을 방문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사는 것 같은 경험을 했고, 미얀마에서는 여자아이들이 백단향 가루를 물에 개서 화장품대신 바르는 삶의 방식을 동경한다.
“미얀마의 현 정부가 서방의 압력으로 무너진다면 아웅산 수치가 권좌에 오르겠지. 그럼 미얀마는 태국처럼 되는 거야. 창녀가 홍등가에 우글거리고 말보로에 코카콜라에 블루진이 판을 치겠지.”
“군부가 폭압정치를 계속한다? 안 될 말이지. 아웅산 수치가 집권한다? 그럼 미얀마는 몇 달 안에 끝나. 그럼 금세 콘크리트와 고층빌딩으로 뒤덮이겠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가능할까?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지.”
그는 1994년 중국과 함께 그가 동경하던 인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즈음 인도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에 대한 기사를 원하는 <슈피겔>지에, 회사의 요구와는 반대로 ‘쥐들을 경배하는 힌두교 사원’에 관한 기사를 썼다.
“코끼리 형상의 신인 가네샤가 타고 있는 동물이 쥐였어. 우리한테는 가장 역겨운 동물인 쥐가 인도인에겐 신성한 동물이었던 거지. 내가 <슈피겔>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절대 그런 나라가 세계 3대 경제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쥐 사원의 존재는 인도가 제2의 실리콘 밸 리가 될 거라는 기대와는 어울리지 않았어.”
“인도는 천의 얼굴을 갖고 있어. 구원인 동시에 저주이고, 파괴인 동시에 창조지. 그래서 인도는 밑 빠진 독이기도 해. 치밀하게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할 수 있는 곳이야. 인도는 위험한 덫이 될 수 있어.”
“내가 맨 마지막으로 느꼈던 커다란 환멸은 바로 인도였다.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난 인도로 눈을 돌렸어. 간디와 인도의 현인들이 주창했던, 불살생(不殺生)과 비폭력주의라는 어마어마한 자산이 있는 나라니까. 그런데 나는 양심적인 기자로서 그 나라의 정치를 취재한 다음, 인도의 정치가 다른 어느 나라의 정치보다 더 나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단다.”
“1949년까지만 해도 인도엔 간디가 있었어. 그가 죽자 ‘폭삭!’ 모든 게 무너졌어. 인도는 갑자기 발전(發電), 철도, 공장, 제철소 같은 것에 매달렸다. 그리고 원자탄에도 매달렸어. 원자탄이라니! 이미 도덕이라고 하는 원자탄을 가진 그 나라가 말이야.”
“난 네가 내 얘기의 핵심을 잘 파악했으면 좋겠다. 그 핵심이란, 혁명과 정치와 과학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헛되다는 거야. 그런 믿음 때문에 나도 사회 참여를 하고 글을 썼었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아무 소용없었어.”
그래서 그는 결국 히말라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과거의 모든 구도자들이 하던 일을 했다. 수도자인 스승을 만나고,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오로지 그 자신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결국 피안에 있는 희미한 빛도 체험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산스크리트 어와 인도 철학을 배웠다. 그는 그의 스승이 하루 종일 사람을 접견하고 가르침을 주는 것을 보고 “스승님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 많은 시간을 쏟으십니까?” 라고 물었다. 스승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난 더 이상 시간이 필요 없네. 내 시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시간이야. 난 이미 내가 도달하고 싶은 것, 해탈에 도달했어. 그러니 시간은 이제 나한테는 필요 없지.” 그는 히말라야의 대자연 속에서 삼 년을 보냈다. 돌과 얼음으로 뒤덮인 바다를 보면서 살아 있음을 느꼈고, 한 마리의 무당벌레가 무한 속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내 삶이 삼라만상의 일부’라는 것을 느꼈다. 스승은 “너의 자아를 깨부수는 날, 하늘까지 악취가 진동할 것이다. 내버려라. 내버려.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내버려라. 빈손으로 서 있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없음이야말로 결국에는 너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니까.”고 가르쳤다.

이름 없는 자로 떠나다
제4장 [이름 없는 자로 떠나다]는 자식에게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다.
아들이 “아빠는 우리한테 어떤 걸 바랐어요?”라고 묻자, 그는 말했다. “아버지의 기대는 아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어. 아이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줘야지. 내가 아버지로서 너희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어. 난 1미터 86의 키에 어디서나 일등이었고, 깔끔한 흰 양복을 입고 원기 왕성하게 활동했지. 남들은 위트와 재치가 넘친 날 언제나 좋아했어. 너희한테는 부담스러운 아빠였겠지. 그런 부담 느낄 필요는 없어. 내가 좀팽이에 겁쟁이에 무능력자였다면 넌 이렇게 투덜거렸을 거야. ‘에이 좀팽이. 나한테 가르쳐준 게 대체 뭐야? 뭘 배운 게 있어야지!’ 반면에 나를 능력 있는 아빠로 느꼈다면 이랬겠지. ‘와, 정말 우리아버지 때문에 숨 막혀 죽겠어!’ 하지만 난 나고 넌 너야. 그러니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야 돼.”
“난 네가 자유롭기를 바랐다. 사나이로서 자유롭기를 바랐어. 그렇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자유와 행복은 결코 함께 가는 법이 없거든.”
이 책의 끝자락에 가면 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많은 가치를 제시한다. 딸의 졸업식에 갔을 때 친구들이 전부 금융 쪽으로 진출할 거라는 걸 들었을 때를 회상하며, 금융권이라니! 그렇게 고생창연하고 역사가 숨 쉬는 캠퍼스에서 거창한 문제들과 4년간이나 씨름하고 나서는 고작 컴퓨터 앞에 앉아 돈의 흐름이나 좇겠다고 하는 생각이 그에게는 신성모독처럼 느껴졌다.
“고작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매일 아침 사무실에 나가 주가변동 그래프의 움직임을 쳐다보면서 샀다 팔았다 샀다 팔았다 한단 말이야? 무슨 인생이 그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는 이유를 아니? 제일 똑똑하다는 애들이 그런 걸 하고 있어서 그런 거야!”
“고문서를 오래 연구해서 솔로몬 왕의 숨겨진 금광을 찾는다거나, 수장된 범선을 수백 번의 잠수 끝에 찾아냄으로써 부자가 된다면 충분히 부자가 될 만하다고 하겠지! 뭔가 멋지고 모험적인 구석이 있으니까. 하지만 고작 작은 투자금융회사의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부자가 된다?”
“네 졸업시험 앞두고 너한테 뭘 선물했는지 알지? 바로 앙코르와트 여행이었다. 난 네게 정글에 감춰진 그 사원을 보여주고 싶었어. 인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날 밤 호텔에서 요새 젊은이들이 뭘 해야 될 지 불안하고 일자리도 못 찾는다고 했지. 난 그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단다. ‘너처럼 그림을 잘 그리면 앙코르와트를 그려 홍콩 관광객들한테 팔면 되겠다. 그럼 일자리를 찾은 거야.’ 사람은 자기가 할 일을 만들어 내는 거란다!”
“젊은이들이 나한테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난 항상 이렇게 말한단다. ‘주위를 둘러봐! 세상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것들로 가득 차있어!’”
“세상이 막혀 있다는 말은, 모든 문이 닫혀있고 모든 자리가 다 차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야. 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할 일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물론 그 일이 자기 능력과 가치관에 맞아야 하고 즐거워야 하지. ‘유감이지만 난 그런 일 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 자세가 필요한 거야. 내 말 뜻 알겠니? 사람은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야 해. 그리고 그럴 수 있어.”
“진리는 길 없는 땅이다.”, “길은 가는 사람이 찾는 거야. 누구도 너한테 ‘봐라. 저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말해주지 않아. 정해진 길을 따라 가면서는 절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해.”
“난 분명히 내 일을 좋아서 했어. 하지만 정말 열정을 쏟은 것은 삶 자체였지. 내 방식대로, 나한테 어울리는 방식대로. 그리고 삶의 소소하고 놀라운 기쁨들 모두를 한껏 즐기면서 말이야.”
“내가 한 당부가 독자성에 대한 찬가로 이해됐으면 좋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는 것 말이야. 알겠니? 그리고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어.”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사는 거 말이야. 진정한 삶, 내게 맞는 삶, 자신을 올바로 인실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거지.”
그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을 때 딸이, 왜 모든 삶과는 정리를 했으면서 가족과의 끈을 놓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누구나 마지막 길은 혼자서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단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죽을 수는 없는 거지. 그러나 문 앞까지는, 의식이 있는 한, 나는 네 엄마 손을 꼭 잡고 가고 싶단다.”
“후회는 전혀 없지. 무엇 때문에 후회가 있겠니? 내가 주인공인 여행을 마쳤는데! 대단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주인공인 여행이었어.”
“죽음이 왜 두려운가요?”
“상실의 두려움… 그러나 난 두렵지 않아. 벌써 다 잃었으니까. 마음이 고요해.”
Prologue
이 책의 원제목은 [La fine il mio inizio]이다. Google 사전을 찾아보니 [The end is my beginning] 즉, [끝은 곧 나의 시작]쯤으로 번역된다. Prologue에서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대화로 시작하여, 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와 그 사이사이로 불교적인 영성적인 대화가 혼재되어 있어 위와같이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정말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
저자가 아들을 불러 자신의 목숨이 꺼지는 그 순간까지 자기의 일생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자식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히말라야에서 수도인 경지에까지 이르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마음 고요히 떠나가는 마당에, 이승에 남아있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기려고 했을까? 자기 일생에 대한 자긍심을 자식에게 심으려고 했을까? 아니면, 이책의 제목대로 자식에게, 나는 이렇게 내가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파란만장하게 원도 한도 없이 살아 왔으니 너도 그렇게 살라고 하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그 점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The end is my beginning]. 나의 시작이란 무엇으로의 시작일까?
우리 하무리 모임에서 죽음과 삶, 인생의 마지막 정리 등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죽음을 어떻게 살것인가]에서부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 수업], [상실 수업], 알폰스 데켄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등 많은 책이 있지만, 그것들은 의사나 종교인, 또는 가족들이 옆에서 보거나 회상하는 형식의 글들이었다. 이 책은 암의 고총을 겪으며 하루하루 신체적으로 약해져 가는 가운데 초연하게 죽음에 이르는 장면을 저자 자신이 생생하게 그려 가고 있다는 게 너무나 소설적이다. 이 책의 표지에 실린 한 장의 작은 사진, 녹색의 풀밭에 인도사람 같은 헐렁한 옷을 입고 긴 의자에 기댄 백발의 아버지와 마주앉아 웃고 있는 아들의 사진은 이 모든 걸 한눈에 보여준다.

내용 중에 ‘누가 너에게 총부리를 겨누어든 미소를 지어라’고 하는 부분은 [어린 왕자]를 쓴 생떽쥐베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생떽쥐베리는 나치 독일에 대항해서 싸운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전투 참가 중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스페인 내란에 참여해 파시스트들과 싸운 적이 있었다. 생떽쥐베리는 그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미소]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썼다.
나는 죽으리라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극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담배를 찾아 호주머니를 뒤졌다. 몸수색 때 발각되지 않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다행히 한 개비를 발견했다.
나는 손이 떨려서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데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성냥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빼앗아 가 버린 것이다. 나는 창살 사이로 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눈과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자와 누가 눈을 마주치려고 하겠는가. 나는 그를 불러서 물었다. “혹시 불을 좀 빌려 주겠소?” 간수는 나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기 위해 걸어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성냥을 켜는 순간 무심결에 그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니까 어색함을 피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난 그 상황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가슴속에 우리들 두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물론 나는 그가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의 미소는 창살을 넘어 가 그의 입술에도 미소가 피어나게 했다. 그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고 나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그가 단순히 한 명의 간수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새로운 차원이 깃들어 있었다. 문득 그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자식이 있소?”, “그럼요, 있고말고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얼른 지갑을 꺼내 허둥지둥 나의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아이들 사진을 꺼내 보여 주면서 앞으로의 계획과 자식들에 대한 희망 등을 이야기했다. 내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다시는 내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될까 봐 난 두려웠다. 난 그것을 간수에게 고백했다. 내 자식들이 성장해 가는 걸 지켜 볼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 슬프다고, 이윽고 그의 눈에도 눈물이 어른거렸다. 갑자기 간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일어나더니 감옥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나를 조용히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소리 없이 감옥을 빠져나가 뒷길로 해서 마을 밖까지 나를 안내했다. 마을 끝에 이르러 그는 나를 풀어주었다. 그런 다음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뒤돌아서서 마을로 걸어갔다. 그렇게 해서 한 번의 미소가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삶의 위기의 순간에 미소를 잃지 않음은 진정한 용기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행진을 계속했다고 한다. 격동적인 시대를 겪었던 부모들 세대가 자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오롯이 담고 있다는 점과,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에도 치우치지 않았지만 깊이 있는 통찰이 이 책으로 하여금 많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이런 의미와 깊이는 ‘전쟁’과 ‘민주 항쟁’등 굴곡 많은 역사를 겪은 우리들에게도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격렬하게 독재에 항거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던 젊은 시절. 어느새 ‘생활인’이 되어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 언젠가 우리들도 티찌아노 테르짜니처럼 아들을 앉혀두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우리들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네가 살아가며 갈림길을 만났는데 한 길만 오르막길이고 다른 길은 내리막이라고 하자. 이럴 땐 반드시 오르막길을 택하거라. 내리막길이 걷기에 더 편하지만 그 길을 가면 결국에 구덩이에 처박히게 돼. 올라간다는 건 희망을 품는 거야.”
풍부한 체험과 사색에서 나온 너무나 좋은 명구들이 가득하다.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